Project Description

2021. 09. 16 – 11. 27

박진아  이혜인

Interview

2021. 09. 13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4층
이제 +  박진아 + 이혜인

이제
《아우라는 모퉁이에서 만나지》의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이 전시에 참여하는 박진아, 이혜인 작가 두 분이 여기 계시는데요. 두 분의 2인전이어서 저에게는 더욱 특별한 자리입니다. 처음 이 전시를 제안받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그리고 이 전시를 통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박진아
그동안 흥미로운 작업을 꾸준히 발표해 온 이혜인 작가님 작품에 관심이 많았기에 같이 전시 하는 것에도 기대가 컸어요. 최근 몇 년 동안 대형 회화 작품들에서 보여준 이전과는 다른 레이어링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야외 사생에서 시작했지만, 이미지가 겹치는 기법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또는 프린팅 기법을 사용하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이번에는 어떤 작품들을 보게 될지 무척 궁금했어요. 오늘 인터뷰를 진행해 주시는 이제 작가님과는 작년에 2인전으로 만나 함께 전시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보니 회화 작가의 2인전이기 때문에 둘의 작품이 오히려 대비되면서 더욱 각자의 작품 세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전시가 됐었는데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도 이혜인 작가님의 작품과 제 작품이 각자의 색깔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번 전시에서도 말씀하신 긴장과 대비가 잘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혜인 작가님은 어떠세요?

이혜인
아무래도 2인전의 특성이 여러 측면에서 풀어내기 까다롭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박진아 작가님과의 전시여서 수락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평소 몇 번의 대화가 있었고 예전부터 작가님의 그림을 좋아하던 터라 함께 전시하면 좋은 시너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선배 작가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대했던 것 같아요. 또 한동안 머물렀던 지역인 독산동의 새로운 예술공간이라는 점도 좋았습니다.

이제
그럼 본격적으로 전시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박진아 작가님은 이전에 전시 설치 현장이나 공연 무대의 준비 모습, 밤 풍경 등 여러 소재를 다루면서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평범한 순간들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이어지는 것 같은데, 모두 신작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새로운 회화 연작들에 대해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박진아
이번에 예술의 시간에 전시한 유화 작품들은 모두 신작으로 작년과 올해에 그린 작품들입니다. 2층에 전시된 그림들은 예술의 시간의 모기업인 ㈜영일프레시젼의 공장 내부와 쇼룸 등을 투어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습니다. 공장 내부의 여러 장소와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재가 된 작품이에요. 4층에 걸린 유화 2점은 미술 공간에서 예술작품을 포장하고 옮기는 장면, 그리고 새벽녘 공공조각을 설치하는 인부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려진 대상은 다르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의 순간을 그린다는 점에서 2층과 4층의 작품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회화 작품을 하기 위한 스케치로서의 드로잉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스케치들은 이번에 처음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혜인 작가님은 이번 전시에서 2016년에 제작한 <수퍼 테이블>(2016) 시리즈와 과거 대만에서 발표하셨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발표한 적 없는 (2018) 시리즈, 그리고 신작 <달까지 히치하이크>(202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작품에 대한 소개와 이번 전시에서 이 작품들이 어떻게 한곳에 모일 수 있었는지 그 의도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혜인
우선 2016년에 독산동에서 작업했던 <수퍼 테이블> 시리즈는 박진아 작가님의 공장을 그린 작품들과 함께 배치하면 좋겠다는 제안으로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좁고 긴 복도 벽에 걸린 시리즈는 2018년에 대만의 사운드 아티스트 Lu Yi와 진행한 협업으로 서로 화상 통화로 대화하는 장면을 그린 작업인데, 저와 통화를 할 때 주로 작업 어시스턴트로서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장면들이 독산동 지역의 현장성을 보여주는 그림들과 잘 매치가 된다고 생각해서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4층에 전시된 신작 <달까지 히치하이크>는 최근에 진행한 작품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작업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습니다. 야외에서의 작업을 실내로 가져오는 것에 관해서, 그러니까 ‘스튜디오 밖에서 경험한 그리기의 체험을 어떻게 실내 작업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최근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을 담은 작업이 <달까지 히치하이크>입니다. 그리고 양옆에 서 있는 작품 <안내서 왼쪽>(2021), <안내서 오른쪽>(2021)은 제 작업실 벽에 걸려있던 <달까지 히치하이크>의 왼쪽과 오른쪽 벽면을 각각 사진으로 출력하고, 그 이미지 위에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썼던 일기나 드로잉들을 레이어링 한 작업입니다. 이렇게 2층과 4층에 작업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산동의 골목 풍경, 화상 통화의 장면, 작가의 작업실 모두 어떤 장소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과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에 관한 설명을 들으니까 확실히 전시가 더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박진아 작가님께 추가로 질문하고 싶은데요. 작가님의 작품에는 무언가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항상 등장하잖아요. 이번 신작에서도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새로운 풍경과 함께 보입니다. 공장 내부에서 제품의 제조 과정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공간이 스튜디오나 전시장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어요. 혹시 공장 내부에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예술가의 초상들로 보고 작업한 부분도 있을까요? 그리고 신작을 진행하면서 특히 더 관심이 가거나 친숙하게 느꼈던 인물이 있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박진아
작업실 풍경처럼 보였다니, 저에게는 조금 의외의 시각이네요. 저는 이전에 그렸던 그림들과는 꽤 다른 성격의 작품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려왔던 인물들, 예를 들어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영화를 찍는 사람들, 백스테이지, 그리고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 중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인물을 그린다는 것이 이런 면에서 기존 작품의 소재와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아 놓은 자료들을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제
어떤 차이와 과정이 있었나요?

박진아
제가 긴 시간 공장에 머물면서 원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공간을 투어하는 형식으로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도 공간과 인물이 낯설었고, 그들에게도 외부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사진 촬영이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면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전 작품에는 관찰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인물들을 주로 그려왔고요. 그래서 이번 신작은 저에게는 낯선 결과물이자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장에는 직선이 많고 특유의 색상이 있었습니다. 막연하게 제가 이전에 그려왔던 이미지들과 비슷한 시각적 특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공장의 장소성이 꽤 강하다 보니 수많은 직선과 고유의 색을 어떻게 배치하고 구성할지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2층에 <샘플>(2021)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공장의 쇼룸이 배경이 되는 작품인데요. 영일프레시젼의 직원과 큐레이터, 작가가 쇼룸에 전시된 제품을 함께 보고 있는 장면이에요. 쇼룸이 전시장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세 명의 등장인물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익숙한 구성입니다. 그 그림이 다른 그림에 비해 훨씬 쉽게 그려졌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저에게는 공장이 낯선 풍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낯선 공간을 그려보는 재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조금 더 진행해 보실 생각도 있으신가요?

박진아
모르겠습니다. 사진 자료가 그렇게 풍부하지는 않아서요.

이제
저 역시 말씀하신 부분을 작품에서 많이 느꼈는데요. 낯선 공간에서 표현된 거리감을 신선하게 봤습니다. 특히 정면을 마주하는 눈빛은 기존 작업에는 거의 없었던 건데요. 작품을 보는 사람도 작품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약간의 불편한 경계를 마주할 수 있어서 더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이혜인 작가님은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기간 동안 독산동 지역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 시기에 <수퍼 테이블> 시리즈 작업이 나왔나요?

이혜인
사실 입주 기간은 아니었고, 그 다음 해였습니다. 제가 입주해 있었던 때에는 메르스 때문에 오픈 스튜디오가 취소됐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 해에 기획전을 같이 하면서 <수퍼 테이블>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이제
그러셨군요. 그러면 그 기간에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서 지냈던 일 년이 작업으로 반영이 됐을 텐데 관련된 얘기들을 듣고 싶습니다.

이혜인
입주 기간에 한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수퍼 테이블> 시리즈와 함께 설치한 음악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음악을 먼저 만들고, 그 이후에 그림을 그린 거죠. 음악 작업인 <31 days of KRCS>(2015)는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멍가게들에서 하나같이 김밥, 담배, 라면, 커피를 팔고 있는 게 인상적이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네 가지가 이 동네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필수품같이 보였고, 이것들로 한 달을 산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하며 이 네 단어를 랜덤으로 배치한 가사를 먼저 쓰고, 이것을 코드로 바꾸어 음악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구로, 독산동 지역은 제가 대학생 때부터 경험했던 공간이라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당시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경험 삼아 공장에서 몇 달간 일했던 지역이 독산동이었고, <수퍼 테이블> 시리즈는 이러한 개인적 경험과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당시의 기억을 그린 그림 한 점도 시리즈에 포함이 되어있고요. (이번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학생 시절의 경험은 현재의 작업의 방향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지역을 다시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전시하는 일련의 과정은 관찰자로서 지역을 탐구하는 동시에 저 자신에 대한 반추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금천구 독산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혜인 작가님과 오랜 인연으로 만들어진 장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장소와 만나는 것, 그곳을 관찰하는 것, 그리고 여러 경험을 거쳐 다시 작업으로 대면하기까지 여러 사건들이 있었네요. 작품 이미지에 숨겨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장소의 경험이나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하실 때 본인만의 원칙 같은 게 있을까요?

이혜인
처음 야외 작업을 했던 장소는 제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 앞 들판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거기에 머무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작정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서 있다 보니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뭔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보이는 것에서 판단이나 계획을 배제하고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이전 작업 방식과는 달리 조금씩 자연스럽게 그리게 된 것 같습니다. 최대한 수동적 자세로 의도성을 드러내지 않고 환경을 반영하여 작업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인 것 같습니다.

이제
그렇군요. 어떤 상황이나 상태에 온전하게 반응하려고 하는 과정이나 태도가 중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4층 전시장 얘기를 해볼게요. 이 공간에서는 두 분의 작업이 적극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박진아 작가님은 큰 테이블 두 개에 다수의 드로잉들을 배치하였고, 이혜인 작가님은 프린트와 페인팅이 병합된 대형 회화 작품들을 설치하였습니다. 수직, 수평 같기도 한 상이한 설치 방식이 저에게는 유쾌한 대비로 느껴지는데요. 박진아 작가님은 실제 드로잉이 나왔고, 이혜인 작가님은 드로잉에 대한 개념을 다루는 작업을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박진아 작가님께 여쭤보겠습니다. 11년 전 성곡 미술관 개인전에서 전시했던 드로잉 시리즈를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예상하고 있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드로잉이었습니다. 어떻게 전시하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박진아
2010년 성곡 미술관 개인전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급하신 당시에 전시했던 작품은 드로잉 작품은 아니었고, 종이에 그렸던 작은 크기의 수채화 작품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전시하는 종이 작품들은 드로잉을 위한 드로잉이 아닌, 대형 유화 작업을 하기 전 단계의 스케치로서 드로잉입니다. 저는 주로 의도하지 않고 우연히 찍은 스냅 사진 여러 장을 하나의 장면으로 합친 후 회화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하거든요. 물론 하나의 사진이 하나의 회화 작품으로 재현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여러 개의 사진에서 원하는 부분을 가져와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합니다. 제가 찍은 사진들이 연출해서 찍은 게 아니라 우연히 찍은 사진들이기 때문에 원하는 장면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죠. 드로잉 단계에서 인물을 원하는 구도로 배치하고 색도 정하면서 전체적인 구성을 합니다. 장면을 구성하는 단계에서 하는 실용적인 목적의 드로잉인 것이죠. 이 스케치들은 이전에 전시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 정도 이렇게 작업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했고요.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다는 것, 제품 제조 과정의 장면을 그렸다는 게 제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과 의미 있게 연결된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에 처음으로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래서 전시 밀도가 더 높아진 것 같아요. 확실히 4층 전시실에서는 두 분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박진아 작가님의 회화는 워낙 자연스러워서 여러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작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정교한 과정이 수반된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진아 작가님의 회화를 오래 보아온 분들은 더 생생하게그 과정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함께 전시된 이혜인 작가님의 작품에서도 실제 작업실 벽과 그 위에 중첩된 여러 이미지를 통해 최근 작업에서 진행 중인 생각의 흐름이나 주변의 상황들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안내서 왼쪽>과 <안내서 오른쪽>에 관한 설명을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이혜인
저도 박진아 작가님의 경우처럼 전시에서 작업의 과정이 드러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드로잉을 전시하자고 제안하셨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그려왔던 드로잉들을 꺼내 보았는데, 전시되는 작업들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보여줄 수 있을지 판단이 어려웠습니다. 지금까지 작업했던 드로잉을 단순히 보여주기보다 <안내서> 시리즈 같은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시도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작업실에서 멍하니 벽을 볼 때면, 그림 옆에 붙어 있는 드로잉이나 사진, 물감 등의 흔적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것들은 왜 작업이 되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후, 자연스럽게 실내 작업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한동안 주로 야외에서 작업하다 실내로 들어오니 너무 낯설었습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프로세스를 끌어내야 할지도 고민이었습니다. 야외 작업을 할 때는 끌리는 어떤 순간을 그리면 되는데, 실내로 오니 작업을 하게 만드는 계기를 무엇으로 삼아야 할지가 고민이었어요. 매일 달라지는 주변과 나의 상황 속에서 무언가가 왜 꼭 그려져야 되는지, 그림으로 남겨져야 하는 필연성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매일 달라지는 걸 흔적으로 남기는 게 그림이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부터 작업실에 있는 캔버스 외에 테이프나 물감의 흔적, 드로잉도 어떤 의미에서 페인팅과 동등한 무게감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페인팅의 주변부를 담은 사진 위에 드로잉이나 페인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캔버스에 출력하는 프린트 비용이 많이 비쌌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예술의 시간에서 지원해 주셔서 작업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건을 이번에 만나게 되었네요.
박진아 작가님의 드로잉 제안과 프린트할 수 있는 여건, 그리고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들이 만나서 실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순간이 자주 오면 좋겠습니다.

이혜인
새로운 작업을 해보는 것 자체는 의미 있었는데,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계속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일기를 많이 썼습니다. 가끔은 그리는 것보다 글쓰기를 더 많이 할 때도 있습니다.

<안내서 왼쪽>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썼던 다이어리를, <안내서 오른쪽>은 안내서 시리즈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 드로잉한 것을 그대로 확대해 작업실 벽을 촬영한 사진프린트 위에 스텐실 기법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달까지 히치하이크>가 계속 레이어를 쌓아가면서 남겨진 페인팅이라면, 그 주변부에서 작업을 도왔던 작업실 환경이나 작업 과정은 <안내서 왼쪽>, <안내서 오른쪽>으로, 세 그림이 한 세트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오래전 누군가의 꽉 찬 다이어리 노트를 구경했던 경험이 떠올랐어요.
중요한 일정이나 감상들이 있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암호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하고, 사진과 스티커 같은 장식들이 철저히 주관적으로 구성된 페이지를 엿본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나의 풍경으로서 작업실 벽이 주는 생생함이 잘 느껴졌고, 최근에 보여주는 레이어가 많은 회화 작업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박진아 작가님 작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아까도 잠시 얘기가 나왔지만, 이번에 새롭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에 실험실, 생산 라인, 창고 등 공장의 여러 장소가 등장하잖아요. 이 공간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박진아
공장에 생각보다 여러 장소가 있었습니다. 제가 본 건 더 많았는데, 사진 자료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공장을 그리려고 생각했을 때 구체적으로 의도했던 건 없었어요. 내가 무엇을 볼지, 어떤 장소인지 몰랐기 때문에 실제로 들어가보고 발견하는 걸 그리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어를 하고 난 후 찍은 사진을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장소성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소성이 충분히 드러나면서도 너무 전형적이지 않게 그리고 싶었는데, 대체로 인물과 색을 통해서 그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작품 <기둥>(2021)에서는 화면 한가운데 큰 기둥을 배치했어요. 좌우로 대칭 구조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이 상하로도 흰색과 회색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렇게 기둥을 가운데 배치함으로써 일부러 독특하고 저에게 어려운 구조를 만드는 시도를 한 것인데, 이런 시도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제 작품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전 작업에서도 그랬지만, 공장을 그린 작품들도 사실적인 재현만을 목적으로 한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거든요. 다른 공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회화의 공간, 그리고 감각으로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느껴져요. 그런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님의 노력이나 과정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박진아
그림을 그릴 때 빛의 효과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화면 안에 조명을 넣어서 조명이 발산하는 빛이나 톤으로 분위기를 만드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히 새로운 소재를 접하면서 재현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공장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재현에 신경 쓴 것인데, 또 한편으로 너무 사실적 재현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이렇게 장소성의 재현과 주관적 해석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해 그리는 동안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제
갈등의 수고와 고민을 창작자가 끌어안고 녹여냈기 때문에 우리가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박진아 작가님의 풍경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박진아 작가님이 스스로 창작자, 기획자, 편집자이자 비평가의 역할을 균형 있게 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작업에서도 내적 균형감이 특유의 안정되고 부드러운 미감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혜인 작가님 작업으로 방향을 돌려볼게요. 최근 ‘하이트컬렉션’과 《인 블룸》, ‘뮤지엄헤드’의 그룹전의 야외 작업에서 확장된 결과를 보여주었는데요. 작품을 보면 작가님은 풍경을 다방면으로 접근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직접 그 풍경의 시간과 공간을 탐구하거나 풍경을 재현하는 방식 자체를 열심히 연구하기도 하고, 풍경을 그리는 주체인 화가 자신에 대한 고민을 내놓을 때도 있거든요. 하나의 풍경과 시공간을 통과해가는 경로 자체가 작업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총체적인 과정에서 작가님이 마주한 순간의 생각, 감각, 기억 등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이혜인
제가 작업을 하게 된 장소들은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림이라는 통로를 통해 장소와 제가 접속되는 어떤 순간을 기대하고 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이 없다면 이 작업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작업을 해 온 제 고향 지역의 들판은 저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이자, 시간을 초월하는 어떤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한편으로는 개발 때문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한시적 공간으로서, 그곳의 시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고자 하는 초조한 마음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아마도 그곳이 타인은 전혀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근원적인 시공간을 느끼게 해 주고, 이를 통해 단편적으로 시간에 따라 변화해 가는 저 자신을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느낌을 주어서인 것 같습니다. 뭐라 꼬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그 느낌이 제가 회화에 담아내고 싶은 정수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아직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그 장소에서 보고 느끼는 것을 계속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진아 작가님도 그러시겠지만, 그리는 행위 자체가 그 자체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환기하게 하는 힘이 있잖아요.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다른 대상을 통해 나를 마주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요. 그리는 모든 행위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면 ‘그 옛날 인류는 동굴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도대체 왜 했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 생각을 하면 까마득해지면서, 내가 하는 일의 의미, 어떤 흔적을 남긴다는 것, 내가 그린 그림을 누군가가 본다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제
작업 이야기가 한 존재의 성장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혜인 작가님의 삶과 작업이 그만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혜인 작가님은 작품을 통해 어떤 방법론을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왜 했고, 어떻게 했고, 어디에 와 있는지 계속 스스로 뒤돌아보면서 확인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현재 한국의 회화는 굉장히 상이한 여러 시공간이 혼재하고 있는 풍경처럼 보입니다. 한국의 동시대 회화 작가로서, 특히 여성 작가로서 박진아, 이혜인 작가님은 지금 한국의 현대 회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본인의 작품에 대해 스스로 어떤 의미를 두는지, 그리고 앞으로 기대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이혜인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을 작가로서 살아왔지만 그동안 미술계에도 여러 변곡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지금 시점에서는 회화가 많은 작가에게 사랑받는 매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회화를 다루고 있고, 자기만의 방식을 갖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회화는 사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더 가까운 장르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작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회화 매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학생일 때는 왜 회화를 하는가에 대한 이유와 타당성에 대한 나름의 답이 없으면 왠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디지털 기기들이 우리 삶의 일부로 들어왔잖아요. 그러한 변화로 인해 오히려 시각 매체 자체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원래 미술에서 시각성을 책임지던 회화가 장르로서 재발견되고, 다시 흥미롭게 변화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련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궁금하고, 자신을 포함한 회화 작가들에게는 어떤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혜인
요새는 SNS 같은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면서 자기 작업을 발표할 장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굳이 공식적인 전시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개의 장이 많아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미술을 하는 작가의 층이 다양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는 공식적인 과정을 밟아야만 전시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SNS를 통해서 작품을 올리고 발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또 그런 창구를 통해서 판매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통의 장은 확실히 활성화되고 있는 거죠.

저는 오히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조금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회화의 역할이 있었고, 그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그런 질문 자체가 너무 무거운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지에 관해 애써 해왔던 고민이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소용이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물론 작가층이 다양해질수록 저는 제 역할을 해나가면 되겠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진 것은 확실한 변화인 것 같습니다.

이런 흐름대로 계속 가다 보면 결국에는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가 얘기했던 것처럼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일반 사람들도 자신만의 매체를 가지고 표현하는 세상이 됐고, 이런 변화는 점차 심화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카데믹한 체계를 밟아 온 작가들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앞으로의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박진아 작가님은 어떠세요?

박진아
저도 이혜인 작가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시각매체가 발달하고 이미지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젊은 작가들이 회화를 예전보다 훨씬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디지털 이미지를 접하는 시간과 양이 많아지면서 시각 언어 자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게 된 것 같아요. 서로 조금 비슷비슷한 성향들도 있긴 하지만, 저는 예전에 비하면 시각언어가 풍부하게 발달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회화가 가진 ‘직접 그리는 즐거움’ 안에는 본능적인 감각, 신체적인 감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각 언어를 신체적으로 구현해 낸다는 것이 단순한 이미지 재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회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커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우리나라뿐 아닌 전 세계적인 흐름인 것 같아요. 전 세계 사람들이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동시에 보고, 거기에서 받는 영향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유행도 동시에 일어나죠. 이러한 면에서 회화는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말보다는 다양하게 많이 하고 있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저 역시 이런 시대의 변화에 반응하는 회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의 입장을 질문해 주셨는데요. 회화에 있어서 50대 이상의 여성 작가-그러니까 저의 선배-가 특히 드물다고 봅니다. 물론 중요한 여성 작가분들이 많이 계시지만요. 예를 들면 윤석남 선생님은 회화로 시작하셨지만, 그분을 보통 회화 작가로 한정 짓거나 대표작을 회화 작품으로 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시 회화를 보수적인 옛날 매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활동하신 여성 작가들로서는 정해진 틀을 탈피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중요한 역할이었을 것 같아요. 따라서 회화 작가가 많지 않았을 것이고요. 또 한편으로는 꾸준히 작업을 해왔지만 회화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던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있었을 거라 예상해 봅니다.

그래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 회화 작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근래에 유럽 등 서구에서 이런 기획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특히 모더니즘 시기에 추상회화 작업을 했던 아방가르드 여성 화가들을 조명한 전시가 흥미롭게 보입니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도 이렇게 연구가 이루어지는 여성 작가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동안 소개된 여성 회화 작가들이 늘 소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그들의 활동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해서 더해진 공백도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관한 전문 연구와 국공립 미술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제
다음 질문도 조금은 무거운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팬데믹이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두 분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진아 작가님은 독일과 한국을 오가면서 작업하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실제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었나요?

박진아
아직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 때문에 그곳에서 적극적으로 작업실을 마련하고, 준비하는 일들이 미뤄졌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서울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팬데믹 이후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작업할 시간은 늘어났지만 심리적으로 집중하기 어려웠던 시간이 꽤 있었습니다. 해외를 다녀오는 과정이 만만치 않아서 다녀오는 시간보다 자가 격리를 더 오래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작업에도 분명히 영향은 있었지만, 어차피 화가라는 직업이 작업실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아서 크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작가는 늘 자가 격리를 해 왔죠.(웃음)

박진아
네, 작업할 때는 저를 둘러싼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작업 자체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딱히 꼽을 수 없지만, 간접적인 변화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예 자가 격리 때문에 나온 작품들도 있고요. 집에서 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작품에 오일파스텔이라는 재료를 처음 써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 더욱 익숙하게 된 온라인 공간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저는 SNS를 하기는 하지만 이전에 작품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회화는 실제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제 작품을 작은 이미지로 온라인상에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씩 온라인에서 작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개인전을 했는데요. 현실적으로 서울에 계신 분들이 부산까지 가기가 쉽지 않기에 작품과 전시를 쉽게 볼 수 있도록 평소보다 이것저것 많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온라인 프레젠테이션을 시도해 봤습니다.

이혜인
저도 작년부터 해외에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모두 무산되었어요. 그러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가족들과의 시간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생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그러면서 동생이나 가족이 자연스럽게 작업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는 꼭 나쁘지만은 않았던 일 같고, 개인적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전시된 작업 중에는 야외 사생 작품이 있는가 하면, 페이스타임처럼 실시간 대화창이 나오는 작품도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두 풍경과 연관이 깊어 보이는데요. 작업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혜인
야외 작업을 할 때 특별히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팬데믹 상황에서 진행하는 야외 작업은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페이스타임 작업은 팬데믹 이전인 2017년부터 시작했는데 LA에 거주 중인 이강승 작가와의 2인전이 계기가 되어 제작하게 된 작업입니다.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두 작가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조건을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작가분께 화상 통화를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페이스타임을 통해서 처음 만났고, 동영상 화면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2017) 시리즈를 제작하게 됐습니다. 그 작업 이후에 제가 LA에 갈 기회가 생겼고, LA에서는 반대로 한국에 있는 비어 있는 상태의 제 작업실을 보면서 그린 (2018) 시리즈도 나오게 됐습니다.

또 비슷한 경험으로 타이페이에서 전시를 할 때는 갤러리에서 저와 대만 사운드 아티스트를 연결해 주었고, 그 친구와 화상 통화를 하면서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이전부터 야외에서 경험하는 실재 공간과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의 경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작업을 계기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만남의 경험이 어떻게 전통 매체인 회화로 나타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렸습니다. 그것이 , 최근의 <꽃 구름>(2021)과 같은 작업으로 발전했습니다. 야외 장소에서의 작업 시리즈가 한편에 있다면, 정의할 수 없는 온라인의 어느 공간에서 진행하는 작업 시리즈가 또 다른 한편에 있습니다. 저는 이 작업들이 어떤 데이터처럼 쌓여가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의 경험을 회화로 표현하고자 고민했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과 실재의 공간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제
두 분께서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 특별히 관객과 소통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혜인
작업하는 사람으로서는 ‘내가 이런 걸 보여주고 싶다.’라고 생각해도 보는 이들이 느끼는 바는 제각각인 것 같아요. 작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순간을 만났다고 느꼈거나, 나 자신에 관해 깨닫는 순간들이 있고, 야외에서 작업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의 순간 같은 걸 만날 때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그림에 잘 담겨 있다면 이걸 보는 사람들한테도 ‘마치 테이프를 다시 되감기 하는 것처럼 동일한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박진아
저는 전시라는 건 많이 보러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뿐 아니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도 이미지를 단순히 이미지로서 감상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었다는 이야기를 잠시 나눴었는데요. 이 작품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고,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건지, 주제가 무엇인지를 많이 물어봤어요.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무슨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지에 관해 설명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과 답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물감이 발려진 어떤 느낌이 좋다든지, 붓질의 감각이 좋다든지, 이건 이런 식으로 보인다든지 등등 자유롭게 감상하는 반응을 보면서 회화에 접근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림을 본 사람이 저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이 말은 내가 나중에 사용해야지.’하고 생각합니다.(웃음)

이렇게 관객이 상당히 정확하게 그림을 보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보기도 해요.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특히 저는 제 그림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원치 않고 보시는 분들이 각자의 해석으로 봐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최근 적극적이고 다양한 관람층이 많이 늘어났죠.

박진아
나름대로 즐기고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정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두 분이 2인전으로 만나셨는데 서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진아가 이혜인에게, 이혜인이 박진아에게 말한다면,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이혜인 작가님부터 부탁드릴게요.

이혜인
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작가님의 작품을 봐왔지만, 이번 기회로 작가님과 작가님의 작업을 다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박진아 작가님 작업을 처음 접한 때가 2007년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문탠>(2007)이라는 작품이었는데, 한눈에 그림이 들어올 정도로 인상적이어서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 후에도 작가님 그림의 자연스러운 붓 터치라든가 물감의 질감 같은 것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회화의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참 후에 직접 뵙고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제 작업에 대해서도 진지한 감상과 조언을 해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선배 작가 중 여성 회화 작가가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소중한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저의 작업에 대해 얘기해 주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회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전시 준비 기간 중에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누기는 어려웠지만, 전시 오픈을 시작으로 저도 작가님의 작업을 자세히 다시 들여다보고 여러 생각을 나눌 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제가 갖지 못한 걸 갖고 있는 부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뭔가 채우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데, 작가님의 경우 텅 비우는 시원한 붓질이나 공간감이 정말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진아
이혜인 작가님의 작품을 오랫동안 알았는데 밀접하게 작가님과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어요. 이번에 전시를 같이하게 된 덕분에, 작품을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서 좋습니다. 항상 작가님의 실험정신에 감탄하곤 했거든요. 어떤 작품들을 같이 전시하게 될지 궁금했는데 신작 <안내서> 시리즈를 재미있게 들여다봤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조금 전에 나눴던, 이혜인 작가님의 회화에 대한 고민이 겹쳐서 보였어요. 아까 디지털 매체로 회화를 접하는 것에 관해서도 언급을 했었는데, 저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이혜인 작가님이 직접 작품으로 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안내서> 시리즈에는 <달까지 히치하이크>의 이미지 반쪽이 나와 있고, 그 위에 덧붙여진 드로잉과 일기도 있습니다. 예술의 시간이 화이트큐브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벽면이 작품 안의 벽면과 연장된 공간으로 보이기도 해요. 이건(예술의 시간의 벽) 진짜 벽이고, 저건(<안내서> 시리즈의 벽) 프린트된 이미지로서의 벽이고요. 그리고 그 위에 붙어 있는 드로잉들은 이미지인데, 그 위에 다시 실제로 드로잉을 한 것도 보입니다. 이 두 작품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의 작품이에요. 작품 안의 테이프는 진짜로 붙어 있는 것인지, 이미지인지 헷갈리거든요. 스프레이 칠한 것도 진짜인지 이미지인지……. 아직도 모르겠네요. 진짜로 칠한 건가요?

이혜인
진짜인 것도 있고, 원래 그려진 걸 찍은 것도 있어요.

박진아
회화가 실재이기도 하면서 가상공간이잖아요. 이혜인 작가님은 실재와 가상이미지, 가상공간들이 중첩된 모습을 통해 ‘도대체 회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본인이 던지는 집요한 질문에 답을 찾고, 그 답을 작품으로 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실재 공간에서 전시되지 않았다면, 이 수많은 레이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실제로 봤을 때만 이미지와 실재를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작품을 온라인으로 본다면, 레이어가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하는 회화, 전통적인 감상 방법으로 보지 않으면 감상이 되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면서, 이혜인 작가님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면서 작업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안내서 오른쪽>의 뒤에 있는 창에서 빛이 들어오는데요. 캔버스에 비치는 서명은 작품의 뒷면에 하신 서명인 거죠? 여러 레이어 중 하나같습니다.

이혜인
저도 저렇게 보일 줄은 몰랐는데요. 설치하고 나서야 ‘내가 저기에 왜 사인을 했을까?’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 전시 제목이 《아우라는 모퉁이에서 만나지》입니다. ‘아우라Aura’는 두 분의 굳건한 회화 세계에서 나온 말로 생각되고, ‘모퉁이’는 여기 금천구 독산동 예술의 시간을 은유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제목 같은데, 두 분은 제목에서 모퉁이를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두 분은 어디에서 만난다고 생각하세요?

박진아
처음 들었을 때는 ‘모퉁이’가 구석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느낌을 받아서, 쉽게 발견하기 어렵지만 존재하는 ‘아우라’를 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모퉁이’는 직각이니까 두 작가의 대립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네요.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서 만나고 있는 두 개의 다른 세계라고 해석했습니다.

이혜인
저는 일단 ‘아우라’라는 말이 들어가서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아우라’를 보러 왔는데, ‘아우라’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요. ‘모퉁이’라는 말이 그 부담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준 것 같습니다.(웃음) ‘모퉁이’는 각자 다른 길을 가던 사람들이 어떤 곳에서 만나 교차하는 지점을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역시 두 분은 시각적인 정의를 내려 주시네요. 인터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시간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작업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주신 박진아, 이혜인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전시를 보는 관객들이 두 분의 작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서 계속되고 있는 두 분의 연구와 실험, 고민을 지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특별히 동시대 회화 작가로서, 현재 이곳의 미술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저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우라는 모퉁이에서 만나지》 전시와 인터뷰를 기획하신 예술의 시간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박진아(b.1974)는 스냅사진의 이미지를 회화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동시대 삶의 순간을 추적한다. 그려진 일상의 장면들은 무슨 일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직전, 변화가 생기는 순간, 사건과 사건 사이 ‘전환의 상태’에 놓인 시간을 담아 회화라는 플랫폼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평범한 순간들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주요 개인전은 《휴먼라이트》(국제갤러리 부산, 2021), 《사람들이 조명 아래 모여 있다》(합정지구, 2018), 《백스테이지》(교보아트스페이스, 2018), 《네온 그레이 터미널》(하이트컬렉션, 2014), 《스냅라이프-성곡 내일의 작가》(성곡미술관, 2010) 등이 있으며, 인천아트플랫폼(2021), 뮤지엄 SAN(2020), OCI미술관(2016,2014), 삼성미술관 플라토(2015), 국립현대미술관(2015), 아르코미술관(2014) 뉴욕 두산갤러리(2013), 베를린 주독한국문화원(2010) 등에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영국 런던 첼시미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등 여러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과 독일 뉘른베르크에 거주하며 작업한다.

이혜인(b.1981)은 개인의 신체가 주어진 환경적 조건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으로서 그리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작업한다. 베를린쿤스틀러하우스베타니엔(2013), 금천예술공장 (2014), 두산샐러리뉴욕 레지던시프로그램(2015) 등에 참여하였다. 《완벽한 날들》(대구미술관, 2013), 《Sync》(신도문화공간, 2018), 《어느 날, 날씨를 밟으며》(갤러리 기체, 2020) 등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아티스트 파일 2015: 동행》(국립현대미술관, 도쿄국립신미술관, 2015), 《Will you be there?》(Project Fulfill Art Space, Taipei, 2018), 《밤이 낮으로 변할 때》(아트선재센터, 2019), 《재난과 치유》(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1)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에서 활동한다.

이제(b.1979)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형태의 기억, 정서, 관계를 회화로 형상화한다. 작가는 일상 속의 인물, 사물, 풍경 등에서 현대인의 상실감, 불안감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온기, 활기, 의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작가는 특히 개별 주체가 지닌 잠재적 힘, 다양한 방식의 연대 가능성 등에 주목하여 세상을 관찰하고 그린다. 국민대학교 회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한다. 《페인팅 기타 등등》(산수문화, 2021), 《손목을 반 바퀴》(갤러리조선, 2017) 등 8회의 개인전과 《stranger than paradise》(보안여관, 2019), 《트윈픽스》(하이트컬렉션, 2016)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고, 2019년에는 ‘종근당 예술지상’에 선정되었다. 2015년부터 비영리 미술공간인 합정지구를 운영하고 있다.


아우라는 모퉁이에서 만나지
Aura, met at the corner
2021. 09. 16.(thu) – 11. 27.(sat)
주최 |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후원 | ㈜영일프레시젼
참여작가 | 박진아, 이혜인
디렉터 | 주시영
큐레이터 | 이상미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 정지은
사진촬영| 송호철
그래픽 디자인| 어떤디자인스튜디오